안녕하세요 시절의 고요입니다. 어느 책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 하나.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혀가는 일이다.
언 강에 미혹된 것이 그때부터였나 보다. 나는 내가 잃은 목소리가 거기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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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다면 언 강에서 겨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와 그녀는 한참 강 앞에 머물다가 문득 심장을 내려 앉히는 큰 울림을 들었다. 먼 산속에서부터 오는 짐승의 울음 같기도 했지만, 사실 그건 눈앞의 강 깊숙한 곳에서 얼음이 녹아 부서지는 소리였다.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두렵고도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랬을 것이다. 방금 들었던 소리가 환청으로 느껴질 만큼, 언 강은 견고한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강도 영영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 소리를 얼려두나 보다. 어느 때 산과 땅을 울리도록 그리운 소리가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며, 얼음 모자를 쓰고 있는지도.
우리는 그 소리를 한 번 더 듣기를 바라면서 말없이 서 있었다. 더없는 겨울의 마음으로.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한정원 <시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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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절의 고요입니다. 여러분, 영영 잃고 싶지 않은 것. 강이 얼어갈 때 봉인해두었다가, 강이 풀릴 즈음 되살리고 싶은 것. 혹은 영원을 바라는 것이 있나요?
가끔은 영원이라는 말이 왜 존재하나 싶을 만큼 야속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강 속 깊이 얼려두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가족을 향한 조건 없는 마음, 사랑하는 존재들과 살갗으로 함께 공유하는 기억, 연인과 켜켜이 쌓아온 시간, 잃기 직전의 존재들, 튼튼한 다리와 치아,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던 건강 등등.. 세상에! 끝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 같아요ㅎㅎ) 그리고, 아득한 어린 마음도 그중 하나랍니다. 잃은 건지 잊은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서서히 옅어지는 어린아이의 마음. 시절의 고요의 '시절'은 계절의 의미와 함께 그런 유년 시절을 뜻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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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마련한 어른의 세계에 가까워질수록 몸이 뻣뻣해지고 사고는 게을러지고. 혹여나 성실한 자세로 부지런히 생각을 키우다 보면 경험의 울타리에 갇혀 오직 기울어진 이성을 앞세우는 곳.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 라면 그럴듯한 논리 바깥으로 밀어내 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곳. 그런 방향으로 마음이 자주 넘어지는 곳.
이런 웃픈 세계에서 갈증을 느낀 건 되려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거듭 의식하고 말하는 방식으로 그 시절의 목소리를 강물 깊숙이 얼려두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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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가끔,
자연으로 향하는 어느 날.
싱싱하게 살려둔 아이의 마음을 챙기는 거예요. 때로는 언어 보다 몸을 앞세울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바삐 치환하기 보다 자연의 맨살을 먼저 느껴볼 수 있도록.
소복이 쌓인 흰 눈의 아름다움과 골치 아픈 뒷면을 머리로 헤아리기 전에 거침없이 발자국을 내고 맨손으로 푹 쥐고 마는 아이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채로. 나의 탁한 두 눈에는 보이지 않던 본질 속으로 곧장 걸어가는, 자유로운 아이처럼 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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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상강(霜降) 편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어린이 감자 시식회'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이미 서너 계절을 훌쩍 건너온 이야기지만 잘 갈무리해두었다가,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올해도 (저의 체력과 계절이 허락한다면) 어린이 모임을 열어 보고 싶어요. 그럼 일기처럼 편히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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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감자 시식회 》
목차
● 무엇을 먹을까?
① 재료 : 하지 감자
② 요리 :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
● 어떻게 만들까?
① 사용할 언어
② 경험의 구성 요소 (시간, 공간, 사람,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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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린이를 초대하기 위해 당근마켓에 <감자 시식회> 초대장을 올리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감자로 어떤 음식을 만들까? 일곱 종류의 감자를 어떻게 소개하면 아이들의 재미를 살 수 있을까?
주로 시장이나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이 하얀 감자만 장바구니에 담아보았기에, 알록달록한 감자는 왠지 낯설었다. 어린이들을 초대하기 전에 나부터 감자와 친해져야 했다.
우선 껍질 색깔이 비슷한 순으로 분류하고, 각자의 이름을 달아주었다. 생김새가 무척 닮아서 영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표면에 덮인 흙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어떤 감자의 흙은 바삭 말라서 건조했고, 어떤 감자는 땅의 수분을 아직 머금은 건지 쿰쿰한 흙 비린내가 나기도 했다. 흙먼지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껍질 색깔을 구분하기 위해 물로 깨끗이 씻었다. 연한 황토색, 자주색, 보라색.. 하지만 같은 황토색 껍질의 감자라도, 절반으로 자르면 속은 또 달랐다.
우리가 달콤한 사과를 먹을 때 심지 주변의 투명한 모양을 사과의 '꿀'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감자도 투명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이것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투명한 그것의 모양은 감자마다 달랐다. 일자 모양, 별 모양, 꽃처럼 만개하는 모양, 우주의 은하 같은 모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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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와 똑닮은 감자도 있었다. 붉은 껍질부터 노란 속까지. '홍 감자'는 특별히 따로 메모해 두었다. 고구마와 닮은 감자를 보면 아이들도 깜짝 놀라지 않을까? 라고 기대해 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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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에 스텐 채반을 넣고 포크가 푹 들어갈 만큼 감자를 쪄냈다. 어떤 감자는 퍼석거리고 어떤 감자는 쫀득한 질감이었다. 소금을 찍지 않았는데도 짭짤한 감자가 있었고 물을 머금은 듯 밍숭맹숭한 감자도 있었다. 혀로 맛보고 손가락으로 눌러도 보았지만 의성어로만 남을 뿐.. 앞뒤 맥락이 없으니 나에겐 그저 허기를 채워주는 색깔이 예쁘고 둥그런 감자들이었다.
사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좋았을 테지만..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홍홍) 이정도 예습에 만족하고 며칠 뒤 창전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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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던 어스름한 저녁. 친구와 함께 창전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깊어가는 어둠을 제치고 노란빛 드는 소담한 공간은 분명 한눈에 들어왔다. 부암댁(이영민 님)이 운영하는 식공간이었다. 지난봄, 소금과 나물을 알고 싶어서 다녀온 연산문화창고에서의 배움이 너무나 즐거워, 운영하시는 공간을 친구와 함께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다양한 재료를 한 가지 주제로 엮어 단정한 음식과 함께 내어주었다.
가짓과 작물인 '토마토, 감자, 고추, 가지'가 주인공이었다. 그는 말없이 침묵하는 재료들의 뿌리를 찾아 문화·역사·생태학적인 맥락을 소개하고 채소의 긴 서사를 들려주었다. 젓가락도 들기 전에 재료 이야기로 빈속을 채우니, 어두운 그릇에 가지런히 눕혀 나온 색색의 구운 감자는 더 이상 그저 허기를 달래는 둥그런 감자들이 아니게 되었다. (과몰입 즐기는 편..)
우리는 바삭한 껍질, 파스스 부드럽게 뭉개지는 속살을 반으로 잘라서 맛보았다. 그리고 나머지 반절은 소스를 찍었다. (소스도 맛있어서 기절,,) 감자마다 유일한 맛이 있어 어떤 감자가 특별히 도드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미세한 질감의 차이가 있었기에 각자의 개성을 살피며 구별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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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다음 요리를 준비하며 말씀하신 '점질감자, 분질감자'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왔다. 감자의 주요 성분은 전분인데, 그 함량에 따라 감자의 성질이 달라진다고. 점질감자는 전분이 적고 수분이 많아서 비교적 단단하고 쫀득하지만, 분질감자는 전분이 많아서 감자를 찌면 껍질이 쩍쩍 갈라지는 포슬포슬한 특징을 지닌다고 말이다.
그러나 "감자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보다, 길러진 환경을 고려하는 건 어떨까요?"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기후, 생산자, 보관장소 등 여러 요인에 따라 감자의 성질은 유연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로웠다. 갖은양념을 덜어내고 감자 본연의 모습에 집중해 본 적이 얼마나 있던가. 그가 자라온 환경을 헤아리고 결과적으로 품게 된 맛과 향을 이해하며 내가 만들 요리와 연결해 본 적이 있었나?
만일 학교에서 삶을 위한 최소한의 교양으로 실용 재료학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아니 음식, 땅, 기후, 사람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순환고리로 엮여 있다는 힌트를 객관식으로나마 암기했더라면, 내가 그동안 발발거리며 좇았던 고자극 음식의 원재료에 한 번쯤은 관심을 기울였을까? 그것이 곧 나의 몸과 주변 환경을 구성하는 것임을. 돌봐야 하는 일임을. 그 사실이 나의 피부 어딘가 희미하게 스며있어, 내가 돌아갈 길을 안내해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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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을까?
② 요리 :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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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사부작을 다녀온 뒤 작은 가슴이 웅장해져 '감자의 속사정'을 알리고 싶은 괜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가 감자를 소개할 대상은 어린이들이었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허헣.. 어떻게 소개한담..'
'아이참, 단순 명료하게 가자!' 예쁜 색깔을 눈으로 보고 투박한 모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과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알록한 색이 아이들의 피부 어딘가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머지는 아이들의 세계가 이끌어줄 것이라 기대해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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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조건을 간추렸다.
첫째, 아이들에게 낯설지 않은 음식일 것.
둘째, 눈과 손의 감각을 다양하게 사용할 것.
셋째, 감자의 색깔이 드러날 것.
집에서, 어린이집에서, 또는 학교 소풍에서 먹어 봤을 법한 친숙한 음식을 떠올렸다. 이따금 할머니가 해주시던 간식, 다 자란 지금도 빵에 발라 먹으라며 한 대접씩 만들어 주시는 음식. 감자 샐러드는 어떨까?
속 재료를 직접 손질하고 골고루 비비며 식빵에 차곡차곡 쌓는 과정은, 아이들의 손끝을 조금은 간지럽힐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요리하는 과정부터 음식을 먹는 순간까지.. 다채로운 색을 눈으로 관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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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자가 아닌 단순한 전달자, 혹은 먹는 인간으로서 그들의 동료이기에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 고민됐다. 어린이들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니 평어까지는 못되더라도 특정 호칭 대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 좋을 것 같았다. 이름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기도 했다. ( ´͈ ᵕ `͈ )◞♡
구체적으로 언어를 고민하게 된 동기도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도 비건 문화나 채식을 경험할 수 있길 바라며 소소한 동네프로젝트를 진행한 때이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비건 쿠키를 만들어 동네 주민분들에게 소개하고 나누게 되었는데, 그때 첫 손님으로 남자 어린이가 깜짝 등장했다. 예상 밖의 인물이었기에 나는 놀란 마음으로 쿠키의 재료와 특징을 설명하다가, "이건 식물성 재료로..."
어라, 이게 아닌데. 싶어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건 초콜릿 넣은 쿠키예요~ 맛있게 먹어요."라는 문장으로 끝을 냈다.
아이가 식물성, 비건.. 이런 단어를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조금 멋쩍어서 지인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고 웃픈 표정을 지었다. 그때 처음 인지하게 되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채 내가 속한 세계의, 내가 편한 언어로, 말하고 있었음을. 어린이의 언어는 전혀 고려해 보지 않았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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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고요한집은 작은 실험실이니, 어린이를 초대할 때 만큼은 식물성 음식을 지향하되 '비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비건, 채식'을 목표점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재료로 몸에 편안한 음식을 만들었을 뿐인데, 여러 결과값 중의 하나가 자연스럽게 '비건'에 해당하는 건 어떨까? 동사로 설명되는 과정 자체가 명사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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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어떻게 만들까?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 (시간, 공간, 사람,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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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재료, 음식, 언어 등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으니, 이제 공간을 채우는 요소를 적어내렸다. 청소와 환기는 물론, 더운 여름이니 실내를 적정 온도로 맞춰 두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의 「저장된 풍경」 앨범을 준비했다. 청소하며 귀에 쏙 들어온 〔다르다는 건〕, 〔계절은 신비하기도 하지〕 의 잔잔한 멜로디와 노랫말이 1차원적인 작은 공간에 풍성함을 더해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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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한 채소와 부재료들은 한눈에 잘 보이도록 테이블 한쪽에 진열했다. 다른 분들은 어떤 방식으로 음식을 소개하는지, 어깨너머로 하나둘 배워둔 것을 공간에 맞추어 배열해 보았다. 음식의 뒷면을 공개하는 일. 그중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곳이 있다면, 단연코 입하立夏(나민주 님)이다. 아름다운 디저트에 계절을 담아내는 곳. 작년 꽃비원의 초여름 마켓에 출점하면서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재료를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식재료에 대한 정직함을 담아 이 글을 작성합니다."라는 사려 깊은 마음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만드는 건 원래 순식간일까? 시각적으로 드러내면서 비시각적인 신뢰가 형성되는 경험은 나에게 정말 특별했다. 시간과 정성이 깃든 디저트의 아름다운 면면도 한몫했지만, 자신의 음식을 부푼 마음으로 정직하게 소개하는 자세를 가장 배우고 싶었다. 나는 그다지 솔직한 사람은 아니기에.. 부족하더라도 의식적으로 닮은 행동을 하며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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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소비자로서 경험한 마음을 본받아, 감자 시식회가 시작되기 전, 아이들 부모님에게 사용할 재료를 보여드리며 간략히 설명드렸다. 가까운 시장, 한살림, 농장에서 구매한 재료, 담근 청의 원재료, 아이들과 어떤 음식을 만들 것인지까지.
'저는 이런 마음을 이어 받았어요. 소소하지만 제가 준비한 건 이렇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건 생각보다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세 명의 어린이와 인사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약 한 시간 반 뒤에 엄마와 만날 것을 약속하며 감자 시식회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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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어린이. (친구와 자매. 여덟 살 친구 두 명과 다섯 살 동생이었던가..) 우리는 돌아가며 이름을 소개했다.
"이상린이 뭐예요?"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이건 뭐예요? 옥수수 껍질인가?"
"우와 나 식빵 좋아하는데"
"몇 살이에요?"
"저희 둘은 학교 친구고요. 얘는 제 동생, 방구 이야기를 좋아해요."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은연중에 욕심냈던 '학습'을 떠올리며 목표를 '놀이'로 수정했다. '오늘은 조심히, 감자의 색깔을 눈으로 관찰하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맛보자. 그거면 충분하다 ㅎㅎㅎ'
친한 친구, 동생과 함께라서 그랬을까? 낯 가리긴커녕 거침없는 질문을 쏟아내는 초롱초롱한 눈빛이 새삼 놀라웠다. 나는 질문의 속도에 맞춰 대답하다가도, 나에겐 '농부'를 설명할 어린이의 언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아주 작은 단위로 풀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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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어 대신 오버스러운 리액션을 택했다. 흙을 살살 벗겨내고, 물로 씻고, 칼로 영차! 자르며 질문을 이어갔다. 흙 묻은 이 채소는 어떤 색깔을 품고 있을까요? 어떤 색이 보여요? 우와 - 껍질이 정말 보라색이에요. 친구가 먹어본 감자는 무슨 색이었어요? 얘는 칼로 자르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
"자두요! 진한 빨간색은 자두 색깔이에요."
"자두 아니에요? 자두 같은데"
"제가 먹은 감자는 이거예요"
"우오아 정말 노란색이에요."
"근데 있죠, 무지개처럼 아름다워요! "
마치 시처럼 '아름답다'라는 아이의 감탄을 들으면서, '무지개'라는 순수한 비유를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첫째는 맑고 투명한 목소리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이 표현하는 세계와 반짝이는 상상력이 놀라워서. 그리고 셋째는 아이들의 풍부한 표현을 나의 몹쓸 기억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즉각 휘발되고 있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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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의 감자를 냄비에 가지런히 담았다. 감자를 찌는 동안 아이들은 옥수수를 한 알씩 떼어냈다. 그동안 나는 시원한 하귤차를 준비했다. 다섯 살 친구가 말없이 특별히 더 맛있게 먹어주어서 기뻤다. 그는 "주뜨 더 주떼여 (주스 더 주세요)"라며 작은 컵 두 잔을 뚝딱 비워냈다. 나중엔 달콤한 음료 많이 마시는 것을 어머니가 원치 않으실 수도 있겠다.. 싶어 물만 채워주었는데, (하귤청 빠진) 물맛을 보더니 "주뜨..!!!!!"라고 외쳤다. 헉, 아이들을 속일 수 없다는 건 이런 것일까..? 라며 뜨끔했다.
아이들이 얼음을 좋아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너무 차가우면 작은 몸이 놀랄 수 있으니 인당 3개씩이라는 기준을 정해주었고, 자신들이 직접 넣을 수 있도록 도왔다. 얼음이 차갑다 말하며 퐁당퐁당 음료에 빠트리는 것만으로도 꺄르르 - 충분한 웃음을 터뜨렸다.
감자가 삶아지는 동안, 작은 공간은 나와 여덟 살 친구들의 무한 끝말잇기, 다섯 살 친구의 방구 이야기로 채워졌고, 옥수수 알맹이 로켓이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 속엔 친구들 사이의 귀여운 경쟁심과 경쾌한 성취감도 있었다. 갑자기 차분해진 동생이 말없이 옥수수를 먹고 있는 현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너모나 귀여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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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포근하게 익은 감자는 껍질 벗겨 큰 볼에 담았다. 다섯 살 동생마저 자신이 직접 해보겠다는 의욕이 샘솟았기에 차례대로 열 번씩 감자를 으깨어 보자고 제안했다. 다만 동생이 감자를 으깰 때면 언니들이 큰 목소리로 응원의 숫자를 세어주자고. 같이 협동해 보자고 말이다.
"협동이 뭐예요?"
나조차도 '협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본 기억이 드물었기에 순간 당황했다. 다 같이 힘을 합하는 거예요~ 라고 짧게 답했다. 나중에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협동: 서로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합함'이라는 아름다운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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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딸기잼을 정말 좋아했다.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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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한 순간도 있었다. 한 친구는 샌드위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선뜻 완성된 음식을 먹기 꺼려 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느낀 걸까. '으엥...? 이걸 먹는다고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친구와 동생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엄지 척! 맛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나서야,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보았다. 그제야 익숙한 음식이라는 듯 샌드위치를 먹었고 엄마에게 나누어 드릴 여분도 종이상자에 담았다.
한 시간 반. 알 길 없이 밀도 높은 시간이 흐른 뒤, 약속 시간에 맞추어 어머니들이 오셨다. 오늘 날씨가 참 덥다며 하귤차를 시원하게 들이키셨고 아이들은 다음번엔 피자를 만들어보고 싶다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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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이 편지엔 12월 안부 인사를, 1~2월 한겨울 이야기를, 입춘 무렵의 소식을 적다가 지우기를 반복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사월의 마지막 날, 편지를 보냅니다. 그간 부치지 못한 계절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못 다한 어린이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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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어느 겨울날.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 눈이 보슬보슬 내렸습니다. 지하철 타러 가던 길이었는데, 지하철을 내리고 나면 그칠 것 같은 엷은 눈이었어요. 그래서 에잇, 걸음을 멈추곤 출구 앞에 서서 어떤 의무감으로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마음먹고' 눈을 만진다니 ㅎㅎ 순간 웃겼어요. 어릴 땐 함박눈 내리면 엄마가 말려도 동생들이랑 바깥으로 뛰쳐나가곤 했는데, 털장갑이 얼어서 손끝 시린 줄도 모르고 커다란 눈을 굴렸는데 말이에요. 커다란 플라스틱 뚜껑을 들고나가 낮은 언덕에서 썰매 타며 뒹굴던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부터 눈이 내리면 생각했거든요. '차 막히겠다, 좀 빨리 출발해야겠네.' 눈을 머리로 바라보고 셈하기 시작한 거예요. 더러워질 신발을 걱정하면서 헌 신을 신거나, 녹아서 질척거릴 땅을 앞서부터 귀찮아하며 말이죠 -
어린 시절 겨울 눈이 만들어준 나의 정서는 어디로 갔을까- 깊숙이 박혀 가까스로 꺼내야만 기억할 수 있는. 내 몸 구석 어딘가 각인되어 있을 무뎌진 감각을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 저도 아이들처럼 차가운 얼음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겠지요?
오늘 편지는 봄의 한가운데, 지난 여름의 감자 이야기를 꺼내 먹고 겨울의 눈을 이야기하는 이상한 형식이 되어버렸지만.. ㅎㅎ 곧 다가올 어린이날을 기억하며 나의 어린 시절 감각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혹시 기억나는 어린이 에피소드나 그리운 시절 이야기가 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공유해 주세요 :) 저는 늘 듣고 있답니다 -
오늘도 긴 소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다음 계절에 만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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