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절의 고요입니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 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다.
- 11월이네
- 그러네
- 곧 겨울 이불 꺼내야겠다
- 어. 새벽에 좀 춥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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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김애란, 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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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시절의 고요입니다. 얼마 전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기념하여 겨울 언어를 찾아보고자 신촌역 중고서점을 방문했어요. 「바깥은 여름」이라는 겨울과 다소 상반된 제목의 책을 들고 서점을 나섭니다.
때마침 점심시간. 알맞게 허기가 져서 가까운 채식 식당을 검색했답니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따끈한 국물.. 이왕이면 오직 채소로 맛을 낸 맑은 음식이 먹고 싶더라고요. 기름지고 단짠단짠한 음식을 좋아하는 터라 흔치 않은 신호임을 깨닫곤 냉큼 버스에 올랐습니다.
고작 몇 정거장을 건너왔다고 '큼큼, 수프와 빵으로는 부족하겠군! 든든하게 밥을 먹어야겠어'라며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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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조용한 식당이었어요.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오래된 세탁소와 녹색 철 대문이 보이고.. 시선을 다시 유리창 안쪽으로 거두니 유리에 붙은 작은 종이가 보입니다. 갈색 종이의 짧은 문장을 눈으로 따라 읽던 찰나,
'우리는 모두 같은 곳으로-'
마침 오목한 유리그릇에 말간 야채수프를 내어주시는 사장님. 든든한 간장 덮밥과 수프를 고민하던 저에게 수프를 조금 맛 보라는 말씀을 남기면서요. 잠시 멋쩍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첫 숟가락을 떴습니다. 파근파근 부드럽게 으스러지는 콩, 아삭한 브로콜리. 붉은 당근과 녹색 샐러리의 향긋함이 맑게 어우러져 몸을 달갑게 녹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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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저물던 지난 2월 즈음, 해달식당에서 땀 흘리며 먹었던 채소수프가 떠올랐어요. 역시 단정한 공간이었답니다. 손님들 오가는 소리, 음식 만드는 분들의 다정한 말소리,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차분한 음악이 흘렀던가? 추운 겨울날 음식 데우는 열기로 커다란 창가엔 드문드문 수증기가 서리고, 실내는 적당한 온도로 따듯했던, 고요히 밝은 식당. 어라, 반면에 수프는 진하고 얼큰하네, 너무 맛있다, 분명 겨울이 오면 다시 생각날 맛이야, 어쩌면 매해 겨울마다 생각날지도 모르겠어, 라며 아쉬운 수저질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 겨울은 먼 미래일 거라고 늘상 가벼이 여긴 걸까. 겨울이 성큼 다가와 내 앞에 우뚝 설 때면 계절이 나만 두고 앞서 흐르는 것 같아서 애가 닳는 건지 아니면 매서울 모습이 두려워 움츠러든 건지. 아직 호들갑 떨만 한 추위는 아니다만 그래도 벌써 입동을 지나 소설이라니, 겨울의 길목에 들어섰다니.
방금 같은 계절들을 떠올리며 겨를 놓친 자신을 탓하며, 눈앞에 놓인 수프 그릇을 물컵처럼 쥐고 바닥이 보이도록 비워냈습니다. 그제야 보이는 유리창 안쪽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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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같은 곳으로 간다.
그러니 천천히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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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 (立冬).
冬(겨울 동)은 아주 오래전 夂(뒤처져 올 치)라는 글자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풀리지 않도록 줄의 양쪽 끝을 묶어 놓은 모습 같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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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夂은 '어떤 일을 마치다, 끝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해요. 시간이 지나고 冫(얼음 빙)이 더해져 冬(겨울 동)이 되었는데, 비로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을 뜻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니 입동(立冬)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계절을 매듭짓는 시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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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소설(小雪).
매해 가을이면 투덜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선선한 날씨를 즐길만하면 가을이 지나가 버린다면서요. 그런데 올가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건.. 저뿐일까요? 매년 수능 전후로 확연히 달라지는 공기를 체감하며 두툼한 점퍼를 꺼내 입은 것 같은데. 이상 기후로 인해 가을도 돌아갈 길을 잃은 건지, 얇은 외투로 버틸만한 날들이 이어집니다.
날씨 때문에 당황스러운 건 저희 할머니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아요. 다른 해보다 늦은 김장을 마치고도 볕이 좋아서 가을 무를 넉넉히 손질하셨거든요. 뿌리는 잘게 썰어 햇빛 아래 고루 말려주고, 잎은 깨끗이 씻어 빨랫줄에 죽- 널어 놓는 일을 반복하셨답니다. 따스한 볕에 무가 퍼석퍼석 잘 마르니 아주 만족스러워하셨죠. 온 집안에 무의 풋내와 알싸한 마늘 생강 향이 퍼졌습니다
의외로 상추가 복병이었어요. 여름 내내 잘 뜯어 먹은 상추의 홀씨를 털었는데, 가을 빛이 길어지면서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 새싹이 돋는 거예요. 그래도 입동이 지났으니 밤에 새싹이 얼어 버릴지도 모른다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영차영차 화분을 실내로 옮기셨지요. 조만간 잘 익은 김장김치와 여린 상추를 함께 식탁에 올릴 수 있겠다고 자랑도 하시면서요.
하지만 실내로 들어온 상추는 기특할 만큼 쑥쑥 자라더니 별안간 전멸하고 맙니다. 흑흑.. 속상한 할머니가 허탈이 웃으며 장난스레 말씀하시길, "그냥 볕에 둘 걸 그랬어. 날이 추울까 봐 안에 들여놨더니 저거는 다 죽고, 바깥 화분에 남은 한 뭉치는 그대로 살았어. 나 참. 날씨가 오래 따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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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雪)
어느날 갑자기 시름시름 죽어가는 실내 상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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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雪)
남몰래 숭 - 덩 자라난 바깥 상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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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부터 소설까지 그동안 어떤 음식을 식탁에 올렸는지.. 되돌아보았어요. 주로 몸이 원하는 뜨끈한 국물 요리나 묵직한 겨울 향이 나는 음식을 찾은 것 같습니다.
속이 풀리는 근대 된장국, 온갖 채소를 넣고 월계수 잎의 향을 더해 뭉근하게 끓여 낸 토마토 수프, 두유와 로즈마리로 부드러운 가을의 풍미를 살린 단호박 수프, 시나몬과 원당으로 달콤하게 조린 사과조림, 꼬리부터 입까지 단팥으로 가득 찬 길거리 붕어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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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계절의 상차림과 구분되는 특이점이 있다면.. 지난 계절의 양식을 야금야금 빼먹는다는 것일까요? 봄과 여름에 저장해둔 (아니 어쩌면 화려하고 풍요로운 여름 식재료에 밀려서 뒷전이 되어버린..) 진한 된장, 시큼한 장아찌 같은 음식을 식탁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나온 계절이 나를 먹여살리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또 다른 사람들이 떠올라요. 등허리 굽는 줄 모른 채, 느린 손으로 밤늦도록 배추를 썰고 절이는 할머니.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 거르는 식구들을 위해, 오며 가며 집어먹을 수 있도록 포도를 알알이 따내고 얼큰한 찌개를 끓이는 아빠.
오롯이 제힘으로 차렸다고 생각한 겨울의 식탁은 사실, 너그러운 계절과 느린 손들의 마음으로 차려진 것이었음을. 나는 그 마음을 먹고 자라나 비로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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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소금을 와락 부어서
김치가 영 마음에 안 드네.
배차 김치를 짜게 만든 건 또 처음이야. 하나 먹어봐,
더 추워지기 전에 깍두기를 하나 더 담글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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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감자랑 고구마도 가져다 먹구
양배추는 내일 아침에 쪄 먹어
이것만 푹 - 쪄도 쌈장에 한 끼는 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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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하나는 통깨고 하나는 부순 깨야.
이건 다진 마늘이니까 냉동실에 얼려 두고,
먹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 써.
검정 봉투에 넣어야 색이 덜 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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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小雪)의 양식
작년 이맘때쯤 건조했을 할머니표 무말랭이. 오독거리는 식감을 음미할 때마다 생강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지난 계절이 나를 먹여살리는 일을 기억하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야지..' 라고 계절의 마음과 느린 손의 시간을 헤아려 보는 요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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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커피 좋아하시나요?
저는 커피를 정 - 말 좋아해요. 커피의 맛과 향을 깊이 알진 못해도 하루에 두세 잔은 마실 만큼 커피를 즐겨 마신답니다. 그런데 최근, 처음으로 디카페인 커피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계절의 리듬에 몸을 맞추어 보는 건 어떨까? 싶었거든요.
사실 제가 커피를 마시는 가장 큰 이유는, 늘 깨어있기 위함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자연은 일찍 밤으로 향하는데.. 저는 그 흐름을 이겨내겠다며 잠들지 않은 채 아득바득 버티고 있더라고요. 커피를 연달아 마시면서 말이죠.
그래서 이번 겨울만큼은 습관을 아주 조금 바꾸어 보기로 했답니다. 비록 커피를 한 잔으로 줄이는 정도이지만,, 홍홍-. 해가 저무는 시간에 맞추어 몸도 자연스럽게 잠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 보려고 해요.
채소수프를 나누어 주신 사장님의 말씀처럼,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곳으로 가니, 천천히 가자는 걸 기억하면서. 어떤 지점에 빨리 도달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 보다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곰곰이 헤아려 보면서, 되도록 느리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 ´͈ 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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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차를 마시고, 건강한 끼니를 챙겨 먹고, 행복 지수를 위해 달달한 디저트도 물론! 놓치지 않으며, 충분한 잠을 자는 것.
이것이 제가 입동을 맞이하는 방식이 될 것 같아요. 그간 몸을 위한 애씀은 뒷전으로 미뤄두었으니 고요한 겨울만큼은 몸에 귀 기울이며 한 해를 건강히 매듭지어보려 합니다. 사실 이렇게 사소한 노력이 과연 소용이 있을까.. 의심되긴 해요. 하핫.
만약 여러분만의 건강한 습관이나 몸을 돌보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면 조언을 부탁드려요. 크고 작은 노력 모두 좋답니다.
오늘도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을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겨울을 맞이해 보아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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